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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강삼협-자歸 - 굴원의 고향

 

  자귀 (梯歸/지귀) 굴원(屈原)의 고향

  무협관광을 끝낸 빅토리아 선박은 자귀라는 곳에 정박을 한다. 이곳은 충신이며 중국인들에게는 너무나 유명한 시인 굴원(屈原)의 고향이다. 자귀에서 향계하(香溪河)라는 강을 따라 올라가면 향계(香溪)라는 곳은 중국의 4대미인 왕소군(王昭君)의 고향이다.

 자귀에 정박한 배는 제 3협인 서릉협이 시작되는 곳으로 이곳에서 움직이지 않고 밤을 보낸다. 식당에서 식사를 마친 승객들은 선착장에 마련된 민속공연장으로 안내되어 공연을 보고 저녁은 배안의 시설에서 보낸다.

  민속공연
 선착장에 설치된 무대에서 유람선 손님들을 위하여 공연을 하며, 승객들에게 요금도 무료이고 볼만은  하다. 주요 레파토리는 다음과 같은데 기간에 따라 내용이 조금씩 달라진다.

 무대는 삼협의 아름다운 경치가 그려진 아름다운 그림을 배경으로 공연을 한다. 이곳 특유한 옷차림은 농사일에 편리한 바지와 저고리 스타일로 실용적으로 만들어져 있다. 산골짝에 씨뿌리는 처녀와 농사짓는 총각 그리고 그들의 결혼식 풍경을 재미있게 보여준다. 소삼협에서 보았던 섬부(纖夫)들의 애환을 담은 구성진 노래와 함께 섬부의 춤은 힘을 다하여 배를 끄는 섬부들의 몸동작을 잘 나타내준다.

 그리고 빅토리아호에 동승하고 있는 예술가 슈가 나와서 서예솜씨를 보여준다. 손님중에 대만인 한사람이 있었는데 그사람의 이름을 가지고 즉석에서 한시를 지어 손가락으로 먹물을 찍어 화선지에 글을 써준다. 7자 * 4줄의 28자로 된 한시는 중국인들은 내용을 이해하고 박수를 쳤다.

 이어서 중국우산을 들고 나온 여자 배우들이 나와서 춤을 춘다. 남쪽지방이라서 짧은팔 의상에 월남스타일의 치마와 함께 공연을 한다. 중국에서도 유명하여 인간문화재로 소개되고 있는 노인과 그들이 부르는 사공의 노래는 비록 알아들을 수는 없지만 특이하다. 12명의 출연자가 노인의 선창에 따라 노를 젓는 모습으로 춤을 춘다.

 공연을 보고 선박으로 돌아오면 갑판에 앉아서 흐르는 양자강을 보면서 담소를 나누는 사람, 선박 라이브러리에서 독서를 즐기는 사람, 양제클럽 바에서 칵테일을 즐기는 사람, 그리고 중국인들은 조그만 마작실에서 마작에 열중이다. 양제클럽에는 한국노래도 조금은 있어서 한국노래, 중국노래,일본노래를 곁들여 열심히 갈고 닦은 노래방 실력을 발휘했다. 서양인들은 노래를 듣기만 하고 부르는 것은 익숙하지 않은 듯 오래되지 않아 자리를 뜬다.

 자귀는 조그만 마을이지만, 유람선선착장으로 주막집들이 많이 보인다. 네온불빛도 깜박이면서 손님들에게 손짓을 하나, 유람선에서는 철저하게 외출금지를 시킨다. 음주후 사고에 미리 대비하기 위한 것인가 보다. 평소에 잘 가지 않던 사람들도 못가게 하면 가고 싶어지는지, 시골의 선술집의 빨간등불이 자꾸 가고 싶다고 하는 사람이 많다. 여기 승무원들은 남녀가 삼삼오오 짝을 지워 외출을 한다. 항해하는동안 받은 스트레스를 시골 술집에서 풀려는 모양이다.

 자귀는 굴원의 고향이며, 왕소군의 고향이라서 여기에 소개를 한다.

  굴원(屈原)
 
자귀는 충신 굴원(屈原)의 고향이다.
 중국의 시인이며 충신인 굴원은 기원전 340-278 시대 사람으로 오늘날 까지 중국인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있는 인물이다. 정치뿐만이 아니라 문학에서도 초사(楚辭)라는 중국의 서사시 장르를 만들어 낸 그는 이백과 두보에게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나라가 망하자 이를 비통히 여겨 강물에 몸을 던져 목숨을 버린 애국시인이다. 그가 멱라강에 몸을 던진 것을 기려 음력 5월 5일 단오절이면 강물에 배를 띄워 물고기에게 먹이를 주는 풍속이 지금까지 내려온다.

  충신 굴원의 역사 이야기
 
초나라 충신 굴원은 견문이 넓고 기억력이 뛰어났으며 역대의 치란(治亂)에 밝아 초나라 회왕의 신임을 받았다. 굴원이 회왕의 명을 받아 초나라를 부강하게 하기 위해 헌령(憲令)을 기초하고 있었는데 굴원과 왕의 은총을 다투던 상관대부 근상(勤常)이 그걸 가로채어 자신의 공적으로 삼으려 하였으나 굴원은 이를 거절하였다.

 근상(勤常)은 이에 굴원을 회왕에게 참소하였고 현명치 못한 회왕은 녹상의 말을 믿고 굴원을 멀리하였다.조정에서 쫓겨난 굴원은 머리칼을 풀어 흐트러뜨린 채 장강(長江:양자강) 주변을 방황했다. 실의의 나날을 보낸 이때 굴원은 자신의 참담한 심경을 토로한 많은 작품을 남겼는데 '이소(離騷)'와 '어부사(漁夫辭)'는 그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떠돌이 생활을 하는 동안 굴원의 몸은 고목처럼 마르고 얼굴은 초췌하기 짝이 없었지만 그를 알아본 어부가 있었다.
 
"아니, 삼려대부(三閭大夫)가 아니십니까? 어쩌다가 이런 곳에까지 왔습니까?"
굴원의 대답은 이랬다.
 
"온 세상이 혼탁하지만 나만 맑고 깨끗하며 모두가 술에 취해 있지만 나홀로 깨어 있어(擧世皆濁 我獨淸 衆人皆醉 我獨醒) 그들이 나를 쫓아냈다네"

 여기에 유명한 고사성어 중취독성(衆醉獨醒)이 나왔는데
모두 취해 있는데 홀로 깨어 있다. 세상의 모든 사람이 불의와 부정을 저지르고 있지만 혼자 깨끗한 삶을 산다는 뜻이다.

 굴원은 제나라와 연합하여 진나라에 대항해야 한다고 주장한 친제파였다. 당시 초나라는 굴원의 반대파인 친진파가 득세하고 있었는데 이들 친진 세력들은 진나라의 장의가 6백리의 땅을 베어 주겠다는 미끼에 속아 제나라와 친교를 끊은 후 끊임없이 진나라의 침략을 받게 되고 초나라가 고립무원의 지경에 이르게 되자 회왕은 다시 굴원을 불러들여 다시 등용하려고 하였다.

 굴원은 오직 조국 초나라에 공헌하겠다는 일념으로 수도인 영으로 돌아왔으나 재차 녹상의 참소를 입어 강남지방으로 추방되는 비운에 처해졌다.굴원은 상수(湘水)가를 방황하면서 웅혼(雄渾)의 시 천문(天問)을 써냈다. 172가지 문제를 제기하여 비통한 울부짖음으로 천지에 의문을 호소하였다.

 굴원은 이런 가운데서도 나라에 대한 걱정을 한시도 잊은 일이 없었다. 경양왕 19년(B.C. 280) 초나라는 지금까지의 친진 정책에서 반진 정책을 펴 여러 나라와 함께 반진 동맹을 재건하려 하였다. 그러나 이를 눈치챈 진나라는 초나라를 공격하여 한북(漢北)과 상용(上庸)의 땅을 빼앗고 다음해에는 또 서릉(西陵)을 빼앗았다. 그후 진나라는 초나라의 수도 영을 함락시키고 초나라는 진성(陳城, 하남성)으로 후퇴하였고 다시 초나라의 무(巫)와 금중을 점령하니 이곳은 초나라의 운명이 걸려 있는 곳이었다.

 굴원은 이 소식을 듣고 조국의 앞날에 희망이 없음을 한탄한 나머지 분연히 '애영과 회사(懷沙)의 시'를 짓고 음력 5월 5일 돌을 품고 멱라수(호남성 상수의 지류)에 몸을 던져 순국(殉國)하니 이때 그의 나이 62세였다. 애국 시인이었던 굴원은 중국 시가의 세계에서나 중국인의 생활면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중국 역대의 위대한 시인, 이백(李白)과 두보(杜甫)도 여러 가지 면에서 굴원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다.


 자귀에 있는 굴원사(屈原祠)

 투신 자살한 멱라수 가에는 그의 무덤과 사당이 세워져 있다. 굴원이 죽은 음력 5월 5일은 속칭 단오절(端五節)이라 하여 그를 추모하는 제일(祭日)로 정해져 있다.

  매년 이날이 되면 강남 지방의 사람들은 뱃머리에 용의 머리를 장식한 용선(龍船)의 경주를 성대히 벌이고 갈대잎으로 싼 송편을 멱라수 물고기에게 던져 주고 있다. 전설에 의하면 물속에 잠긴 굴원이 고기에게 뜯어먹히지 않도록 하기 위한 놀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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